조각품들을 해체해 석굴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런 총독부의 몰 역사적 행동은 해방 후 우리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 석굴 천장에 빗물 방지를 이유로 다시 시멘트가 칠해지고 확신할 수 없는 고증과 습기 방지라는 이유로 전실에 목조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석불 보호 차원에
석불사로 칭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있다. 대부분 보살상인 이 감불좌상은 본존불의 바로 전방과 그 후방인 십일면관음상의 상면만을 피하고 그 나머지 벽면에 배치되어 하늘과 땅과의 중간에서 이 석굴의 영광과 장엄을 찬미하고 환희하는 것 같다. 조각 또한 주위의 벽에 있는 다른 여러 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을 보면 지붕돌의 끄트머리를 보면 위로 치켜올라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붕돌의 낙수면 끝을 사선으로 내려친 것으로 끝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탑의 2층 탑신>
<그랭이기법의 기단부>
석가탑은 평평하게 고른 땅 위에 서 있지 않고 울퉁불
불교미술의 정수로 이야기되는 불국사(佛國寺)가 창건되고 안압지(雁鴨池)와 석굴암(石窟庵)이 조영되며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해서 범종(梵鐘)․석등(石燈)․석부도(石浮屠)․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 등에 있어서도 우수한 것이 많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조각솜
석굴암 천장의 3분의 1이 무너져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구멍을 그대로 놔둘 경우 본존불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13년 시작된 석굴암 보수 공사는 석굴암 수난의 시작을 알린다.
당시 일본인들은 석재를 덜어내고 교
불교를 공인하였으며(527년),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536년) 왕권의 전제화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발돋움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었고 대가야국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32년에는 본가야[金官
불상인 국보 제 24호 석굴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95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석굴암에 대해 관심이 증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에는 석굴암본존불상의 보존 문제로 인해 석굴암은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 되고
문화재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로 우리나라는 총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2009년 7월 30일에는 '동의보감'이